긴, 빈 꼬리, 희박하게 가끔 빛



당신은 지구 안쪽으로 패어 있는 땅의 꼬리, 벙커에 들어선다. 이곳은 낯설고 의미심장하며, 희뿌옇고 때로는 혼란스럽다. 언젠가 멍하니 바라본 혜성의 긴 꼬리가 떠오르면 문득 이질감이 느껴진다. 꼬리는 제 몸으로부터 밀려난 먼지로 형성된 것인데,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야 할지 당신은 고민한다. 그러나 일단은 머무르기로 한다. 흔치 않은 순간인 까닭이다. 어두운 탓에 시야가 가로막히는 날이 대부분이지만 지금같이 희박한 빛이 투과하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선명해지기도 하니까. 당신은 이곳을 채우는 존재들의 움직임을 찬찬히 느껴보려 한다.


누군가는 멀리서 풍경을 훑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자신이 선 자리가 이곳과는 분리된 것처럼 두 발을 딛고 서서, 본 것을 나열하고, 마주쳤다고 믿으며, 뒤돌아 빠져나갔다. 깔끔하게 종결된 사건처럼. (그런데 빠져'나갔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일까?)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걸음을 뗀다. 그간 자주 지나쳤던 것인지 텁텁한 공기가 익숙하다. 당신은 자신을 열어젖히고 꼬리의 세계를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만 어떤 존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실패하고 어긋나는 순간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다. 나와 너의 세계가 정확히 포개어질 수 있다는 믿음은 덫이야. 그것은 대상화일 뿐, 오해와 오차 없는 만남이란 없어.



당신은 이 불가능성에 기대어 다시 내딛기로 한다.
덜컹, 덜컹, 하는 소리에 이끌려 간 곳에 정수의 〈Juggler〉가 있다. 던져지는 것인지 떨어지는 것인지 모를 공들이 상승하고 하강한다. 당신은 공의 방향을 식별하려다 곧 반복적인 장면 앞에서 운동 자체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온전한 원을 그리지 않는 포물선의 궤도, 정확히 맞물리지 않는 분할된 화면과 소리. 낯선 세계는 그렇게 빗나가며 틈을 만드는 모습으로 찾아온다. 작업 후반부 텍스트에서 거듭되는 '우리'. 그것은 우리(cage)이기도 하고 우리(us)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에서 태어나고 죽은" 당신이 내딛는 발걸음에 몸이 포물선의 궤적을 그리며 나아가면 바깥의 세계가 비로소 신체화된다. 덜컹대는 소리에 맞춰 숨을 들이쉬고 내뱉길 반복. 집요하게 들러붙는 호흡을 떨쳐내고 싶다면 숨을 멈추는 수밖에 없다. 결코 어떤 궤도에도 들지 않은 채 공중에서 그대로 고여버린 〈가장 아래로 가라앉는 혼자만의 기쁨〉처럼.


이제 길게 이어진 전지홍의 〈빈 유랑〉을 따라 걸어본다. 작가가 반복해 걸었던 수색역과 탄현역 사이 어디쯤, 너른 걸음의 지도가 당신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반투명한 노루지로 인해 겹치고 엉킨 길 앞에서 당신은 지도라는 단어가 의심스럽다. 그러나 어쩌면 지도의 일이란 그런 것이다. 존재의 자리를 정확히 위치 지우기보다 그것들 사이의 흐름을 발견하는 일, 그 흐름을 물결치게 만드는 누군가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까지. 당신을 맞이하기 위해 작가는 지도에서 자신의 위치를 감춘다. 하나의 점으로부터 거리를 측정하고 나와 당신을 분할하는 원근법적 규범에서 이탈한 작가는 같은 길을 매번 다르게 마주하고, 표지되지 않아 잊히는 도시의 끝을 낮은 시선으로 기록한다. 그리하여 길은 군사시설이 있던 빈터와 헤진 땅이 보이는 창문, 병상과 우주가 수놓인 이불보를 향해 휘어진다. 이런 점에서 〈빈 유랑〉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시선의 지도가 아니다. 무수한 신체들과 물질들이 당신의 몸을 에워싸고 생동하는 지도이다.


지도를 통해 우리는 도시의 끝에 다다를 수도 있지만, 때로 지나치곤 했던 가까운 세계를 느닷없이 맞이하기도 한다. 그렇게 시선은 장자현의 〈Houses of Earth〉에 가닿는다. 손톱만 한 진흙을 쌓아 이루어진 오브제가 둥지처럼 시멘트 벽면에 듬성듬성 설치되어있다. 한편 바스러지는 흙덩이를 뭉치고 쌓아 구조를 짓는 방식은 〈with hirundo〉에서도 확인된다. 두 작업은 각각 인간과 비인간이 집을 짓는 행위와 겹쳐 보이는데, 그럼에도 누군가의 보금자리라 단언하기엔 망설여진다. 이곳에 거주할 법한 이들이 휘발된 까닭이다. 그러나 존재란 어떤 이미지로도 고정될 수 없으며, 언제나 재현을 초과하여 실재한다는 점에서 작가는 이들을 가시화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재현을 멈추는 일과 재현의 장으로 진입시키지조차 않는 일 사이에서 작가가 선택한 길을 짐작해본다.


다시 고개를 돌리면, 당신은 최희수의 〈twin〉을 발견한다. 생명이 없는 물체로서 정물이라기엔 생생한 몸처럼 느껴지는 사물이 그곳에 있다. 자신과 닮은 형태를 찾아간 사물들은 서로의 몸을 맞대고, 섞고, 포갠다. 프레임을 벗어난 물리적인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으나 그럼에도 긴장감이 감지된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흐름 때문이다. 서로를 팽팽하게 끌어당기는 사물들, 작가는 멈춘 사진들 사이에 흐르는 중력장을 발견한다. 그렇게 형성된 중력장 안에서 당신은 이제 숨어드는 몸이다. 그리고 당신의 몸과 함께, 창백한 공간에 또 다른 몸이 있다. 사람의 것이면서 가장 추상적인 이미지로서의 몸, 내밀한 사물들이 그 몸으로 향해가거나 몸에서 흘러나온다. 우리는 이 뒤섞임을 끝내 응시할 수 없을 테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신이 멈춘 몸을 살피는 사이 몸도 당신을 바라본 것으로 충분하다.


이제 당신은 밖으로 나선다. 이곳은 금세 아득해지겠지만 누군가 희박한 빛을 덧대었으니 잠깐은 환할 것이다. 당신의 세계도 마찬가지. 당신은 각자의 세계가 정확히 포개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장한 덫을 넘어 오해와 오차를 딛고 펼쳐진 세계로 진입한다. 옅은 신호가 점멸하고 있다. 인식의 장 밖에 있던 꼬리 달린 존재들이 보내는 것일 테다. 서로 다른 세계를 맞닿게 하는 일에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희망하며, 성긴 연결의 빛을 빚어내는 당신. 뒤를 봐, 당신에게 기다란 빛의 꼬리가 부드럽게 너울거리고 있어.
김지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