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작가는 광주를 걸었다. 망월동, 국군광주병원, 상무대 옛 터와 구도청, 전남대학교. 이름 자체만으로 하나의 사건을 상징하는 장소들을 걸으며 그 속의 이야기를 살폈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기며 몸으로 경험한 5·18의 흔적을 자신의 역사 안으로 가지고 들어간다. 개인의 서사 속에 역사적 사실을 나란히 놓아도 보고 뒤집어 놓기도 하며 감정과 인상에 따라 흐름과 형태를 변주한다. 그렇게 개인의 서사와 역사적 사건이 중첩된 기억의 공간이 우리 앞에 놓인다.


작가가 만들어낸 공간은 기념관이나 학습용 영상에서 봐왔던 죽음과 폭력의 이미지 대신 담담한 묘사의 글과 그림으로 채워진다. 광주에서 마주친 새로운 풍경과 경험은 잊고 지내던 기억을 불러낸다. 작가가 꺼낸 이야기는 다른 이들의 기억을 자극해 또 다른 말과 경험을 불러낸다. 기억이 쌓여 더미가 된다. 작가는 그 안에서 본인의 기억과 다른 이의 기억이 맞닿는 지점을, 80년 오월의 누군가와 마주하게 되는 지점을 발견한다. 이를 차분히 적고, 그린다.


관람객들은 작가가 사건을 인식하는 과정과 생각의 흐름을 따라 걸으며 함께 공통의 감각을 만들어간다. 글과 그림들은 시민들의 몸과 일상적 언어를 매개로 이뤄졌던 공동체의 투쟁을 떠올리게 한다. 잔혹한 이미지를 앞세워 기억에 동참할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역사적 사건을 자신의 삶과 연결 지을 수 있는 방식을 그저 보여준다.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알지 못했다’는 부채감으로부터 자유로운 기억의 방식을 제안한다.


기억과 기억이 만나는 지점이 놓여 있다. 나의 기억과 타인의 기억이 만날 때, 기억을 기억하고자 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내면세계로 건너가게 된다. 너의 이야기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서로의 세계를 열어젖혀 함께 우리의 세계를 열어간다. 그곳엔 기억의 자격이나 방식을 운운하는 목소리가 들어서지 못한다. 기억과 기억의 만남, 세계와 세계와의 만남만이 남는다. 기억이 권력이 되기 전에 멈춰 선 자리, 작가의 작품이 놓여 있다.
이하영(독립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