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Layering: 오늘의 날씨는 세네 겹입니다》



전시 《Layering: 오늘의 날씨는 세네 겹입니다》에서 레이어링(Layering)은 각 레이어들이 일부 지대를 공유하며 겹쳐져 있으면서도, 완전히 하나가 되지는 않은 채 각자의 층위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 그 자체를 일컫기 위해 제안된 단어이다. 레이어링은 전시 기획자인 김정아와 참여 작가인 민백, 전지홍, 정다정의 관계 맺기를 정의하는 주요한 개념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전시장에서는 다양한 설정을 통해 레이어링을 시각화하려는 시도가 관찰되었다. 먼저 전시의 도입부에 걸려있는 반투명한 막은 관람자들이 본격적으로 전시 공간 내부로 진입하기에 앞서 마주하는 첫 번째 레이어라고 할 수 있다. 이중 구조 사이에 세로로 결이 새겨져 있는 이 레이어를 바라보면서 안쪽으로 걷다보면, 레이어 너머에 놓인 작품들을 감싸고 있는 반투명한 장막들이 하나씩 걷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막이 모두 걷힌 후에 나타난 리딩 테이블(Reading Table)은 이 전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치이자, 관람자들이 전시장을 탐색하는 데에 활용할 수 있는 나침반이다. 주제에 따라 여덟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는 리딩 테이블은 이름 그대로 관람자에게 읽히기 위해 설계된 테이블이며, 각 구획 속에 서랍 형태의 투명한 판들이 수직으로 정갈히 꽂혀 있는 모습은 관람자로 하여금 자연스레 각 판을 밖으로 끌어내는 동작을 수행하도록 만든다. 이 투명한 판들에는 기획자와 작가들이 전시를 앞두고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레이어를 탐색한 흔적이 새겨져 있다. 리딩 테이블 바로 앞에 있는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이 투명한 판들을 투과해 대화의 막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어서인지, 테이블에 닿은 관람자의 시선 또한 자연스레 빛의 흐름을 따라 레이어링 되고 있는 관계의 장으로 진입하게 된다. 테이블 아래로는 기획자가 던지는 화두 혹은 질문에 대해 작가들이 내어놓은 대답과 그들이 이어가는 대화가 축적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대화의 레이어들은 반듯한 모양으로 쌓아 올려져 하나가 되고 있다기보다는, 어느 지대를 공유하면서도 다소 어긋난 형상으로 위치해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양의 축적은 리딩 테이블로부터 시작해 전시장 가장 안쪽의 공간까지 지속된다.

예컨대 전시 공간의 지형을 날씨지도의 본판이 되는 땅이라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민백과 전지홍, 정다정은 자신의 작품을, 그러니까 각자의 온도나 습도를 반영한 레이어를 저마다와 잘 어울리는 지역에 펼쳐 놓은 셈이다. 그리고 이 레이어들은 맞춰진 퍼즐처럼 딱 들어맞지 않고 조금씩 겹쳐지거나 떨어져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관람자들은 리딩 테이블을 지표로 삼아 곳곳에 펼쳐져 있는 레이어를 하나씩 연결해 나가면서 레이어링의 흔적을 탐색하게 된다. 리딩 테이블 뒤쪽에는 민백의 레이어가 펼쳐져 있는데, 민백의 <Snowstorm, Japan>(2022)은 제목이 말하고 있듯이 거대한 눈보라 속에 서 있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게 하는 8점의 회화 연작이다. 눈이 남기는 얼룩을 닮은 물감의 흔적을 바라보면서, 휘몰아치는 눈이 속눈썹에 올라앉았다가 녹아내리는 차가움이나 바람에 살이 에는 듯한 아림 따위의 시각적·촉각적 감각을 상기해 보게 된다. 대개 민백은 이와 같이 외부세계의 조건을 연상시킬 수 있는 요소를 회화에 반영하기보다는 불확정적이고 미결정적인 세계에 대한 감각을 추상적인 어법으로 표현하고는 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날씨라는 전시의 주요한 겹이 그의 레이어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 눈에 띄는 부분이다.

민백이 작품을 통해 오늘의 날씨의 한 겹을 펼쳐 놓았다면, 전지홍은 그가 펼쳐 둔 날씨 아래를 걷는 나그네와 같다고 비유할 수 있다. <Snowstorm, Japan> 연작의 마지막 작품으로부터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산 속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전지홍의 작품 <아주 천천히, 부끄러움 사이를 걸어본다>(2022)가 늘어서 있다. 걸음으로 만들어낸 지도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기억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보여주어 왔던 전지홍은 이 작품에서 깊은 밤 소백산을 걸으며 마주하게 된 외삼촌에 대한 기억을 펼쳐 놓았다. 순지 위에 옅게 겹쳐진 먹은 깊은 산과 어두운 밤하늘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면서 마치 우주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것 같은 신비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은 바닥으로부터 약 90cm의 높이에 위치하고 있어 마주하고자 하면 허리를 숙여야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하면 마주 앉거나 뒤편으로 물러나야 한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뒤편에 놓여있는 정다정의 <장면 08-터널_낮>(2022)에 걸터앉게 될 것이다. 나그네가 길을 걷다가 나무 밑에 앉아 잠시 쉬어가듯이, 전지홍의 지도 위를 걷다가 정다정이 제작한 벤치의 형상을 한 조각의 한켠에 앉게 된 관람자는 두 작가의 레이어가 겹치는 지점이 이 곳 즈음인가 생각한다.
<장면 08-터널> 시리즈 중 벤치 형상을 한 두 개의 조각 작품에서 정다정은 각 작품의 양 끝에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두 자리를 잇는 터널을 설치했으며, 그 위에는 각각의 터널을 감싸는 낮과 밤의 풍경을 재현했다. 여기에 재현된 장면은 햇빛의 여부나 날씨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펼쳐지는 터널 안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데, 이것은 하나의 현상이나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의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와도 관련이 있다. 정다정이 표현한 것과 같이 우리는 어떠한 순간을 대할 때 시간대와 날씨, 온도, 습도에 따라 다른 감정과 생각을 가지게 되고는 한다. 축축하게 비가 내리는 밤의 터널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상념에 잠기게 했고, 노을이 아름다웠던 맑은 하늘 속에서 마주한 터널은 내일에 대한 벅찬 설렘을 갖게 만들었다. 정다정은 이렇게 상반된 기억 속의 장면을 그의 또 다른 조각 <장면08-터널_낮(외침)>과 <장면08-터널_밤(한숨)>의 설치와 사운드를 통해 시청각적으로 구현해내면서 자신의 레이어를 전시 공간에 널리 펼쳐 놓았다. 이와 연관해 전지홍 또한 <아주 천천히, 부끄러움 사이를 걸어본다>의 작업 노트에서 새까만 밤에 별을 바라보면서 한참을 거닐었던 넓디넓은 산을 다음날 아침에 다시 마주했을 때 실은 그것이 작은 자갈밭이었음을 인지하게 된 경험에 대해 기록한 바 있다. 이처럼 전시장 양 편에 낮과 밤으로 나뉘어 위치하고 있는 정다정의 조각은 빛과 날씨가 만들어내는 감각의 다양성이라는 지점에서 전지홍의 레이어와 관계를 맺는 모습을 보여준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전시장 안쪽을 향했을 때 전지홍의 작품 <가까운 곳 가장 어두운자리>(2022)를 마주하게 되는데, 공중에 놓인 이 작품의 주변을 배회하다가 보면 그 옆에 놓인 민백의 <구름꼬리>(2022)의 분홍빛이 이 작품의 뒷면에 물들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그들의 관계를 ‘등을 댄 채 마주보고 있다’고 표현하곤 하는 전지홍과 민백의 레이어가 가지는 겹침의 지점을 보여주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얼핏 보았을 때 상반되는 표현법을 구축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두 작가는 색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만 생각했던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이는 리딩 테이블을 통해 자세히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구름꼬리>에서 민백은 분홍빛의 바탕색과 인접한 자줏빛, 황토빛, 주황빛의 색을 활용한 얼룩들을 표현했는데, 이 얼룩들은 찍히기도 하고, 흘러내리기도 하고, 옅게 스며들기도 하고, 쓸려나가기도 하며 회화에 흔적을 남겼다가 어느 부분에서는 희미하게 사라졌다. 이를 통해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우리가 발 딛은 땅을 스쳐 지나가 사라져버렸을 수많은 구름의 그림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처럼 민백의 레이어는 그의 회화와 비슷한 모양으로 전시장의 지형에 얼룩을 남기고 지나가면서 전지홍, 정다정의 레이어와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이와 같은 유기적인 구조의 작품 설치 방식은 전시장 안쪽까지 이어지면서 세 작가 그리고 기획자가 만들어내는 레이어의 중첩을 표현해낸다. 그리고 작품을 둘러보던 관람자들은 어느새 전시장 입구에 위치해 있던 반투명한 막 너머에 놓이게 되면서, 그 자신도 이 전시의 한 겹에 담기게 되었음을 인지하게 된다. 이렇게 관람자의 레이어를 탐색하며 겹침의 지점을 찾으려는 전시 구성원들의 시도는 이번 전시와 연계하여 기획된 낭독회인 <옅은 낭독>(2022.06.04.)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옅은 낭독>에서 전지홍은 본 전시의 출품작을 제작하면서 작성했던 글을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낭독했고, 낭독회에 참여한 관람자들은 전시장에 흩어진 여러 레이어들 사이 어딘가에 자신의 자리를 선택해 착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지홍은 자신의 작품과 닮은 옅은 어둠이 깔린 공간에서 관람자들의 주변을 천천히 유랑하면서 글을 읽어내려 감으로써 자신이 그려낸 지도에 관람자들의 레이어를 포개어 나갔다. 이러한 기획은 전시에서 시각화하고 있는 레이어링이 관람자, 즉 전시 구성원 밖의 사람들을 향해 차츰 확장되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전시를 되돌아보았을 때 세 작가의 공통점이나 출품작의 내용 및 형식 상의 유사점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지 않는데, 이들은 그러한 과정이 없어도 전시를 통해 깊이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을 제안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몇 개의 물음을 던진다. 모든 전시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을까? 우연하게 시작된 대화나 시각적인 이끌림 이후에, 서로의 겹을 겹쳐보기까지 어떤 생각과 대화의 과정이 필요할까? 전시를 위해 형성되었던 수많은 관계들은 관람자들과 함께 전시장을 맴돌다가, 전시가 모두 끝난 이후에 찾아 온 정적과 함께 어디로 가게 될까?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 오늘의 날씨는 어떤 장면으로 기억될까?

이가린